정토불교대학 경전반 졸업을 앞두다.
2018년 한해를 돌아보면 가장 뿌듯한 일 중 하나는 법륜스님의 정토불교대학 경전반을 잘 끝냈다는 점입니다.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정토회 경전반은 정토불교대학 후속으로 만들어진 1년 과정인데 출석 기록과 봉사 시간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합니다. 회사를 다닌다는 핑계로 이전에 두번이나 출석일이 부족해서 졸업을 하지 못했던 저이기에, 이번 세번째 도전에서 끝까지 이 공부를 완주한 것에 참 뿌듯함을 느끼고, 또 이렇게 좋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경전반 수업의 의미는 불교 경전의 교리 공부가 아니라 '일과 수행의 통일'을 깨닫고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해를 매듭짓고, 또 다른 한해를 맞이하는 이 때 스님의 법문을 바탕으로 해서 경전반에서 배운 스님의 가르침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정토불교대학 경전반이란?
우리 한국불교는 선종입니다. 부처님으로 시작된 근본 불교가 대승과 소승으로 갈라질 때 우리는 대승불교로 그리고 대승불교에서 다시 교종과 선종으로 나뉠 때 선종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토불교대학 경전반의 교과과정은 근본 가르침인 아함경, 대승의 가르침인 반야심경과 금강경, 선종의 가르침인 육조단경과 신심명, 이렇게 우리의 불교 역사 흐름과 관계해서 편성되어 있습니다.
이중 근본 불교에 해당하는 아함경은 따로 공부를 안하고 천일결사에 참여해서 매일 한편씩 독송을 하도록 되어 있어 천일이 지나면 아함경의 상단부분을 공부하게 되는 것으로 갈음하게 됩니다. (천일결사는 나와 자신과 사회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정진입니다.) 그 다음 대승경전은 많은 경전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경전인 금강경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대승 사상의 핵심이 보살사상과 공 사상이기 때문에 이를 가장 잘 요약 해 놓은 반야심경을 공부합니다. 그리고 한국 불교는 옛부터 화엄종이 강했기에 이 화엄경의 액기스를 모아놓은 의상대사의 법성게를 공부합니다. 그 다음 선종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선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육조 혜능 대사의 법어집 육조단경과 신심명을 공부하였습니다.
정토회의 취지
정토회가 설립된 가장 중요한 취지, 수행의 노선은 일과 수행의 통일입니다. 정토회를 나타내는 상징은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 다른 말로는 행복한 인생, 평화로운 사회, 아름다운 자연입니다. 이것이 정토입니다. 이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개인의 인생은 행복하고, 더불어 사는 사회는 평화로워야 하고, 자연과는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정토회에서는 바른 불교, 쉬운 불교 (대중 불교), 생활 불교를 추구합니다. 선에서는 실질적인 수행을 중요시하며 대승불교의 핵심은 '실천'인데, 정토회는 이 실천을 수행 보시, 봉사를 통해서 해 나가고자 합니다. 이는 근대불교의 중흥조라고 하는 3.1 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 대표이신 용성 스님의 가르침과도 일치합니다. 용성 스님께서는 불교의 지성화, 불교의 대중화, 불교의 생활화를 말씀 하셨습니다. 즉, 정토회는 불법의 정통을 계승해 나가고 있고, 근본을 꿰뚫어 행하고 있습니다.
정토를 일구어 가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수행하고 봉사하고 보시해야 합니다. 수행은 자기 마음을 닦아서 행복해져 가는 것이고, 사회적인 실천이 보시이며, 봉사입니다. 정토회에서는 수행도 하고, 보시/ 봉사도 해야 합니다. 개인을 아름답게 가꾸는 자기변화를 수행이라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회변화를 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변화와 세상 변화를 동시에 하는 것을 '일과 수행의 통일' 이라고 표현합니다.
부처님의 일생으로 돌아가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개개고 아당안지’ 이렇게 정의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하늘 위 하늘 아래 신과 인간세상을 통 틀어서 붓다만큼 존귀한 자가 없다, 즉 내가 가장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수행자는 성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온 세계가 모두 다 괴로움에 빠져있구나 내 이를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 하는 중생구제의 원이 들어 있습니다. 이게 대승불교에서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계승됩니다. 선에 오면 선농일치가 되고, 이게 정토회에 와서는 ‘일과 수행의 통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니 수행을 통한 궁극적인 목표는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 ‘붓다’가 되는 것이고, 정토 건설을 위한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괴로움이 없고 전쟁이 없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성불을 지향하고 사회적으로는 정토를 지향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하고 보시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법륜 스님은 정토회에서는 수행, 보시, 봉사를 반드시 함께 해나가야 함을 1년간의 경전반 수업 내내 학생들에게 거듭 강조했습니다. 특히 자원봉사를 왜 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체험을 통해 배워 나간 경전반
일반 절에서는 믿음만, 교리 공부만 하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식으로 불교를 공부하려는 모습들이 있고, 이는 정토불교대학 경전반에서도 보이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학교 공부하듯이 불교 대학, 경전반에서 공부하려 했었습니다. 법륜 스님께서는 끊임없이 이를 경계하셨습니다. 경전반 수업에서 배우는 것은 내것으로 체험을 하기 위한 기초일 뿐입니다. 운전을 배우는 것을 설명을 듣고 이론만으로 할 수 없듯이 책읽고, 법문 들은 것으로 불교를 다 아는 척 하는 것은 불교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본적인 원리는 필요합니다. 그래서 1년간 수업을 출석 관리까지 하며 듣습니다. 하시만 이 가르침을 지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원리로서 이해해야 함을 스님께서는 끊임없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식으로 끝나면 안된다. 어떻게 내 삶의 변화를 위한 양약으로 쓸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라구요.
수업에서는 법문을 듣고 이해를 하고, 나누기를 합니다. 나누기는 이해를 바로 잡고, 감동을 느낀 것을 나누기 위해 합니다. 감동이 있어야 생활에 변화가 오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또 경전반을 배우는 학생이라면 매일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매일 아침 자기 정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 배운 것을 실천해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집착을 내려 놓는 것도 연습을 해 봐야 합니다.
봉사하는 삶으로
이 실천의 방법 중 하나로 봉사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재능을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어떤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앙도 얼마짜리로 계산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 얼굴을 씻고, 치아를 닦고 돈을 주지 않듯 자기 일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좋아서 하면 자기 성취입니다. 이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나의 일에는 돈을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이니깐 나의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스님이 가르쳐 주신 봉사의 의미입니다.
노동과 봉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노동은 돈을 위해서 남의 일을 해주는 것이고, 봉사는 내 일을 내가 하는 것입니다. 내 일을 하는 것이니 대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면, 그 일은 나의 일이 됩니다. 내 일이 확대되는 것은 내가 확대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수행은 소아에서 대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대아라는 말과 무아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나다 라는 것은 특별히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나다 너다로 나눌 것이 없는 것이지요. 몸 중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면 어느 한 부분만을 나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 입니다.
정토불교대학 경전반에는 정해진 봉사 시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졸업장을 따기 위한 형식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졸업장 어디에 쓸 것인가? 쓸 곳이 없습니다. 그럼 왜 엄격한 졸업 요건을 정했을까요? 경전반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억지로라도 봉사를 한번 해보게 하여 연습을 시키는 것입니다. 경전반 봉사활동 중에는 모금활동이 있습니다. 제 3세계 굶주리는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모금활동을 하는 것이지요. 모금활동을 하면 자기를 발견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돈을 주고 안주고는 지나가는 사람 그들의 몫이며, 우리는 다만 알리는 일을 할 뿐이지만 끊임없이 꺼리는 마음이 올라옴을 지켜보며, 내가 스스로에게 가지고 있는 상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수행인 것입니다. 법당에서 수행과 거리에서 모금을 통한 수행, 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는 곧 공부꺼리이며 남을 위하는 것이 곧 자기를 위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억지로 시키면 노예 노동입니다. 즉, 강제 노역입니다. 그렇다면 일하고 돈을 안받는 강제 노역과 자원 봉사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요? 스스로 안받으면 자원 봉사가 되고, 받고 싶은데 안 받으면 강제 노역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을 구제하라.
자원 봉사는 가장 승화된 형태의 노동입니다. 이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사랑을 행하는 자,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보살은 많은 사람을 돕되 돕는다는 생각도 않습니다. 모든 일이 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금강경 제3분은 대승정종분입니다. 대승사상의 가장 바르고, 가장 으뜸되는 부분이 있는 분이 제3분입니다. 여기에서 '중생이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부처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으로 '일체 중생을 구제하라.' 라는 가르침을 부처님께서 주십니다. 그냥 중생도 아닙니다. 일체 중생 (모든 사람)입니다. 엄청난 스케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괴로움이 없고,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일체 중생을 돕는 것이라는 것이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인 것입니다.
바라는 마음을 내려 놓는 무주상보시
지금 대부분은 남을 돕기 위해 불교를 믿을까요? 아마 내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하지만 금강경 제 3분에서는 남을 도와라, 그것도 일체 중생, 즉 모든 사람의 고뇌를 다 해결하겠다고 마음을 내라고 합니다. 거기에다 여기에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내가 했다'라는 생각을 내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했다'라는 말은 '대가를 내 놔라'라는 뜻이 됩니다. '내가 한바가 없다'라는 것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대가는 꼭 돈이 아니라도 알아달라, 고마워해라 라는 마음까지도 포함됩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제일 안되는 지점입니다. 너무 어려워요. 꾸준히 연습해 나가려 합니다.) 인사라도 듣겠다는 것은 대가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한바가 없다라고 하는 것은 한 일에 대한 기억을 잊으란 뜻이 아닙니다. 나의 일이기 때문에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지 조차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바라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섭섭해 지며, 섭섭함은 고뇌이며 고뇌가 없어지지 않은 자는 보살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해 달라는 마음에서 해주는 쪽으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해 줄래’가 아니라 ‘해 줄게’로 바꿔야 됩니다. 더 적극적으로 '내가 해줄게' 라고 하며 먼저 베풀고, 그 후에는 대가를 바라는 마음을 내려 놓는 것이 무주상보시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보시를 하고 봉사를 해야 합니다. 봉사가 곧 수행입니다. 수행의 과정으로 봉사를 하는 겁니다. 대승은 자기를 해탈해 가는 방법으로 세상에 베푸는 마음을 내고 세상살이를 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보시, 봉사가 수행과 함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즉, 이웃을 위하는 것이 곧 나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일체 중생을 구제하고, 일체 중생을 구제했다는 마음을 가지면 보살이 아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통해 긍정적인 삶의 자세로
일과 수행의 통일을 체험을 해야 금강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체험이 되어야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무슨 말인지를 온전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존재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 공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 사람은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아니다(색즉시공) 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좋은 사람도 될 수 있고, 나쁜 사람도 될 수 있다(공즉시색) 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으로 사물을 크게 보는 것이 좋습니다. 긍정적으로 사물을 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장점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색이 공인 줄만 알면 소승이고, 공이 곧 색이 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대승입니다.
집착에서 고뇌가 옵니다. 집착을 끊고자 산속에 가야 한다고 하면 이것이 출가이며, 소승은 여기까지 입니다. 몸이 비록 우리처럼 세간이 있더라도 집착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해탈입니다.
한해를 보내고, 또 맞이하며
한해가 다 저물어 갑니다. 경전반에서 배운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지난 삶은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습니다.
번뇌가 보리입니다. 번뇌꺼리가 다 수행꺼리입니다. 즉, 재앙이 곧 복입니다. 재앙에서 깨달음을 얻으면 곧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지요. 이 두려울 것 없는 이치를 깨달아 다가오는 새해에는 더욱 수행하며 봉사하며 보시하는 삶을 살아가 볼 것을 발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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